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국의 아침 (문단 편집) == 탐구 == 복식면에서는 [[태조 왕건]]의 성공에 따른 상당한 예산과 소품들. 그리고 광종 시기에 구비된 관복적 특징, 정치 사극이란 특성으로 꽤 고증에 알맞은 수준이었으나, 드라마와 함께 거의 잊혀진 상태이다. [[http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6&oid=020&aid=0000116271|관련 기사]] 사실, 고려시대 왕이 [[통일신라|후기 신라]]에서 이어지는 [[당나라]]와 [[오대십국시대]]의 제왕 복식(특히 복두)을 입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특기할 만한 드라마다.[* [[무인시대]]의 고려 인종 역시 같은 복장을 또 착용하고 있으나, [[송나라]]의 관복이 이미 고려에 전해진 시대이므로 실제와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.] 일부에서는 혼재되어 나타나는데, 극중에서 황제가 바뀔 때마다 의상에 변형을 준 듯 하다. 대표적인 예가 왕실 여성들의 가채로, 혜종 시대에는 조선시대의 올림머리(!)가, 정종 시대에는 당나라 풍이, 광종 시대에는 고계형 머리가 등장한다. 또한 당나라 혹은 여말선초 식의 [[사모]]에서 신라형 [[복두]]를 거쳐서, 고려식 각진 사모관대로 이어진다. 사실 임금의 복두도 어느 정도 논란은 있으나, (왕건의 통천관 논란처럼) 일단은 이 이후 무인시대까지 당나라형 복두가 조선의 익선관을 대신해 사용되었다. 갑옷의 경우, 대부분 전작인 [[태조 왕건]]에서 사용하던 걸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. 극중 여성들의 의상은 [[통일신라]] 때 많이 유행했던 치마를 가슴 선 위까지 끌어당겨서 입은 [[당나라]]식 제흉유군(齊胸襦裙)과 형태가 많이 유사한데, 아직 극 중 배경이 [[통일신라]]가 멸망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는 사실을 반영해서 [[당나라]]식 의상을 입고 나온 걸로 설정한 듯 하다. 이는 [[태조 왕건]]에서도 마찬가지였다. 그러다가 극 중 전개가 거의 후반부쯤 갔을 때부터는 치마를 저고리 위에 입어서 허리 선에 맞춘, 중국 [[송나라]]식 스타일의 제요유군(齊腰襦裙)을 입고 나오는 걸로 설정되었다.[* 이는 후속작인 [[무인시대]]와 같은 방송사에서 몇년 후 방영되었던 [[천추태후]]에서도 마찬가지. 참고로 [[천추태후]]의 경우 제국의 아침과 바로 시대적 배경이 이어지기도 한다.] 장소 역시 전작을 찍었던 [[문경새재]](조령) 촬영장뿐만 아니라, '''[[창경궁]]'''[* 혜종 시대의 궁궐 장면 일부. 여담으로 [[태조 왕건]]에서도 신라 시대의 궁궐 장면을 창경궁에서 촬영하였다.], 북한 [[개성시]]와 [[평양시]]의 [[을밀대]], [[평양성]], '''[[천지(백두산)|백두산 천지]]''' 로케이션 촬영이 주목되는데, 역시 전작인 태조 왕건의 성공과 더불어서 당시 남북관계가 좋아진 덕분에 전폭적인 후원과 촬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.[* 두 배우 모두 [[백두산]]에서의 촬영에 대한 소회가 남달랐다고 후기를 남겼는데, 촬영 당시 현지가 무려 영하 40도에 강풍도 상당히 불어서 특수방한복으로도 견디기 어려웠으며, 백두산 정상까지 오르기 위해 촬영팀이 눈밭에 방송장비를 짊어진 채 8km를 걷기도 했다. [[https://news.kbs.co.kr/news/view.do?ncd=286394|#]]] 다만 백두산 천지에서 촬영한 장면은 멋지긴 하지만, 관련 문서에도 나오다시피 1, 2화의 배경인 943년 당시는 아직 천지가 형성되기 전이다. 여기에 1회에서 왕소(광종)이 형인 왕요(정종)에게 백두산 등반을 하면서 가이드를 해주는데, 두 인물의 대화가 매우 [[환빠]]스럽다. 역사적 사실 측면에서는 영 좋지 못한데, 몇 줄 안 되지만 엄연히 있는 사료를 무시하고 창작해 넣은 부분이 적지 않다. 대표적으로 극 후반부를 장식하는 평주 지방 세력가들의 반란은 사료와 완전히 다른데, 고려사에는 [[박수경]]의 아들 삼형제가 참소로 옥에 갇혔고 이로 인해 [[박수경]]이 화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고 [[효은태자]]는 성품이 포악하고 악소패들과 어울리며 반역을 꾀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. 그런데 극중에서는 막판 박수경의 아들들이 대놓고 반역을 도모하며, [[효은태자]]는 박수경의 아들들이 밀어줄땐 우쭐했으나 유약하기 그지없는 인물로 거의 어거지로 추대된 것으로 묘사된다. 물론 참소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니 반역죄가 씌워진 것으로 각색할 수는 있으나 광종을 직접 암살하려 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전혀 없고[* 이렇기 때문에 극중의 설정과는 정반대로 조선 초의 [[민무구]] 형제들처럼 광종의 친위세력이었다가 억울하게 걸려든 것으로 묘사해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.], 오히려 반란의 주도자로 묘사되었어야 할 [[효은태자]]를 심약한 인물로 그린 것은 각색이라는 말로는 변호가 안 된다. 또 다른 예시로는 극 초반에 다루어진 태조의 승하가 있다. 극중에서는 태조의 사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는지 왕건이 "인생은 뜬구름 같은 것"이라는 '''회한에 찬 말'''을 남기고 승사했다고 소개했는데, [[https://db.history.go.kr/KOREA/item/level.do?itemId=kr&types=o#detail-kingYear/kr_002_0130_0020_0030/1/0943/05|고려사 원문]]을 보면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. 자신이 세상을 떠난 줄 안 신하들이 통곡하자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, 신하들이 폐하께서 붕어하시려 하니 슬픔을 이길 수 없다고 답하고, 그러자 '''웃으면서''' 인생이란 게 원래 그런 것(=사람이 한 번 왔으면 가는 게 순리)인데 뭘 그러느냐고 답한 것. 그러니까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날 줄 미처 몰랐든 혜종이 알아서 잘 수습할 거라고 믿었든간에, 태조 자신은 회한이 아니라 아주 편안하게 승하한 것이다. 당대의 언어 반영면에서도 영 좋지 못한데, 위에서 언급된 [[환빠]]적인 대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'[[후삼국시대]]'나 '민족', '[[문치주의]]', '고려 왕조'라는 당시에는 도저히 쓰였을 법하지 않은 말들이 수시로 남발되며, 극중 인물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뒤에나 받는 묘호나 시호로 부르기도 했다.[* 극중 시점에서 살아있는 후주의 [[세종(후주)|세종]]을 '세종'으로, 의화왕후와 문성왕후를 "의화황후", "문성황후"라고 부른다.] 그 외에도 황주의 호족 황보씨를 '태자 주의 외조부'라고 하는데, 태자 주(경종)의 외조부는 태조 왕건이다. 또 원 간섭기 이후에나 나오는 수랏간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한자어라 [[사이시옷]]이 들어갈 이유가 없기 때문에 '수라간'이 맞으며, 고려 초 왕실의 음식을 만드는 부서는 어주(御廚)라고 불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